세월따라


無我



누가 내게 '당신이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주고 갈 말이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무아(無我)'라는 두 글자입니다.

두번째 세번째 역시 내가 세상에 두고 가고 싶은 말은

'無我'라는 두 글자뿐입니다.

모두가 '나, 내 것, 내 자식 것' 한다면

이 세상은 결국 망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 우리 것, 우리 자식 것' 한다면

이 세상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至人無己 :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神人無功 : 신의 경지에 이른 자는 공을 드러내지 않으며,

聖人無名 : 성인의 경지에 이른 자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느니라.



이 곳에 무(無)자 대신에 자아(自我)를 넣게 되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無我'가 세상을 다스려야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 "세상을 바꾼 가르침" 중에서 -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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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노래를 알 것 같은 기분…”
大雲  (Homepage) 2011-11-02 09:25:00, 조회 : 3,300, 추천 : 472



“이제야 노래를 알 것 같은 기분…데뷔때보다 더 떨려”

데뷔 45돌 전국투어 누비는 ‘슈퍼스타’ 남진

▲ 60대 나이에도 왕성한 의욕을 과시하며 지난 3월부터 전국 투어를 돌고 있는 가수 남진씨. “이제야 노래를 알 것 같은 기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정아 기자
“가수라는 게… 복싱 선수랑 똑같아. 9라운드 10라운드 안배해야 해. 처음엔 편안히 가다가 리듬을 타야 해.”

“공부 이렇게 했으면 고시 패스했을걸? 10여년 슬럼프를 생각하면 지금 나이 먹어 이렇게 의욕 있는 게 참 감사하지.”

1970년대 초 국내 가요판에 황제처럼 군림했던 옛 ‘슈퍼스타’ 남진(65·본명 김남진)씨는 팔팔한 입담을 쉴 새 없이 풀어냈다. 그는 검은 가죽재킷과 청바지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마음도 같이 늙어야 하는데, 몸만 늙어”라고 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오피스텔에서다. 매일 이어지는 연습과 스케줄 틈새로 어렵게 짬을 냈다. 이날도 방송국에 볼일이 있어 여의도에 온 터였다. “아, <한겨레>라면 아무리 바빠도 인터뷰 해야제.”

그는 지난 3월부터 데뷔 45돌 기념 공연 ‘님과 함께 45년’ 전국 투어를 도는 중이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6월까지 올 상반기에만 9개 도시를 돌았다. 공연마다 거의 매진을 이뤘다. 9월부터 들어간 하반기 투어는 내년 2월까지 모두 20개 도시를 돈다. 매달 적게는 두 차례에서, 많게는 열 차례까지 무대에 오른다. 젊은 가수들도 해내기 어려운 ‘대장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지난 8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 마련된 ‘서울 앙코르 공연’에서 발목을 다쳤다. 석고붕대(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도 그는 예정된 투어를 이어가고 있다.

매달 많게는 열 차례까지 무대에 오른다
“옛 노래 있잖아요, 마음은 청춘…절감해요
나이 먹어 이렇게 의욕 있는 게 참 감사”


-이제 깁스도 풀고 목발도 없네요. 발목은 괜찮으세요?

“네, 그래도 조심해야 해요. 연습하다 삐끗했는데, 공연 당일 조금씩 통증이 오더니 그 뒤에 확 안 좋아진 거죠. 내가 무대에서 춤추는데, 연륜이 있다 보니…. 옛날 노래에 그런 게 있잖아요. 마음은 청춘. 이래서 그런 가사가 나오는구나, 절감해요.”

-그래도 운동 꾸준히 하시죠?

“그럼요. 가수라는 게 굉장한 힘과 에너지가 필요한 직업이에요. 한곡 한곡 온 힘을 실어 30~40곡 부르고 난 뒤 10분 더 부르려면 에너지가 몇배나 더 필요해요. 평소 많은 훈련이 필요하죠. 오랜 세월 무대에 섰기 때문에 관객과 남다른 교감이 있어요. 관객이 ‘저 사람 나이 먹어서 힘이 없어 보인다’ 이러면 안 돼. ‘참 열정도 있고 잘한다’ 이렇게 보이는 게 중요해요.”

-발목 다쳤을 땐 그렇게 보이는 게 쉽지 않았겠어요.

“서울 앙코르공연을 하고 그 다음주 광주에서 공연할 때 거의 앉아서 했어요. 공연 40년 만에 내내 앉아서 하긴 처음이었어요. 남진 공연 보겠다고 어렵게 찾아오신 분들인데, 미안하고 부담되더라고. 그런데 지금까지 투어 돌면서 그날이 가장 감동적인 공연이었어.”

“연습하다 삐끗…광주 공연할 때 앉아서 했어요
찾아오신 분들…미안하고 부담되더라고…
그런데 가장 감동이었어…박수 소리 들으면 알지”


-관객들이 더 큰 감동을 받은 건가요?

“박수 소리 들으면 알아. 전처럼 춤추면서 노래하지 않아도 앉은 채로 온 마음으로 노래하니 그 감동이 전달된 거지. 그게 박수로 돌아와요. 이번에 느낀 것이 역시 노래는 느낌을 전달하는 게 참 중요하다는 거예요. 앞으로 무대 위에서 움직임을 좀 줄여볼까? 허허허….”

-데뷔 45돌이나 됐는데, 아직도 노래에 대해 배우는 게 있나요?

“이제야 노래를 알 것 같은 기분인데. 겸손 떠는 소리라 할지 몰라도, 가수로서 이제 그 세월 속 많은 경험이 노래에 녹아드는 것 같아요. 노래는 그냥 자기를 표현하는 거예요. 삶의 희로애락, 여러 파도를 타고 오면서 노래에 더 가까이, 깊게 접근할 수 있는 거지. 이젠 가사에 내 삶을 묻어 몰입하게 돼요. ‘가슴 아프게’, ‘미워도 다시 한번’, ‘빈잔’…, 예전에도 불렀던 노래지만, 지금 부르면 또 달라. 그때 10~30대 팬들도 50~70대가 돼서 내 노래를 또 다르게 들어요.”

-노래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 게 몇년 안 된다고 들었어요.

“한 5~6년 됐나? <문화방송>이 강원도 속초에서 주최한 ‘대한민국 가요축제’에 나간 게 계기였죠. 오래전 알던 피디가 갑자기 연락해서 한번 해보자는 거예요. 너무 긴 시간 노래를 안 해서 자신 없었지만, ‘팬들을 이대로 보낼 수야 없지. 마무리 잘하고 끝을 내자’ 하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죠. 그때부터 오늘까지 주욱 이어진 거지.”

-원래는 영화배우가 꿈이었죠?

“우리 땐 영화배우가 인기 최고였어. 김승호, 김진규, 신성일, 최무룡…. 그래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갔지. 그런데 나이트클럽 놀러 갔다가 우연히 무대에서 노래하게 됐는데, 밴드마스터가 가수 해보지 않겠냐고 한 거야. 연락처를 주고는 잊어버렸는데, 몇달 뒤 연락이 와서 작곡가 한동훈 선생을 소개해주더라고요.”

-그래서 1965년 한동훈 작곡가의 곡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하셨군요.

“데뷔는 했는데, 반응이 전혀 없었어요. 방송 한번 못 나왔어. ‘맨발의 청춘’ 같은 스윙곡이었는데, 지금 들어도 요즘 노래같이 세련됐지. 한 선생이 시대를 너무 앞서가신 분이야. 실의에 빠졌지. 판 내면 다 가수 되는 줄 알았거든. 내가 사회를 몰랐어, 세상의 이치는 다르구나, 깨달은 거지. 이후 한 선생이 나를 오아시스레코드 사장에게 소개해줘서 한달 월급으로 그때 돈 5000원에 계약했지. 그마저 제때 안 줬지만.”

-아버지께서 가수 되는 걸 반대하셨다고 들었어요.(<목포일보> 발행인이던 아버지 김문옥씨는 5대 국회의원까지 지낸 지역 유지였다. 정치인 조병옥·신익희·장면 등이 전라도에 가면 으레 그의 집에서 묵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왜 풍각쟁이가 되려 하느냐’며 반대했어요. 당시 건강이 안 좋아서 병원에 오래 계셨어요. 내가 본격적으로 가수를 하는 걸 잘 모르고 돌아가셨지.”

-가수로서 성공한 건 그 이후로군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 ‘가슴 아프게’로 큰 사랑을 받게 됐어요. 돌이켜보면, 나는 참 축복 받은 사람이에요. 노래만 할 줄 알았지 다른 건 몰랐거든. 근데 좋은 작곡가·작사가 만났지, 훌륭한 연출자·기획자 만났지. 그 시절 대한민국 최고 쇼의 대부인 ‘쑈쑈쑈’ 연출자 황정태씨가 스물한살 신인인 나를 아껴주고 최고로 만들어줬어. <문화방송> 전우중씨도 그랬고. 참 행운아지.”

-그렇게 인기 절정일 때 갑자기 군대를 가셨죠? 해병대로 베트남전 참전까지.

“그 시절 군 미필자는 여권이 안 나와요. 외국 돌아다니며 공연도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군대를 먼저 가자, 매도 빨리 맞자, 한 거죠. 내가 성격이 급해. 그 생각 들자마자 해병대 지원 입대했어요. 어릴 때부터 해병대가 제일 멋져 보였거든.”

-제대하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인 서울시민회관에서 단독공연을 하셨죠?

“1971년 가을, 최초의 리사이틀 1호였죠. 당시만 해도 단독공연이 없었어요. 코미디, 캉캉쇼, 가수도 여럿이 올라 노래하는 옴니버스 공연이 대부분이었죠. (단독공연은) 겁없이 한 거죠. 군대에서 3년간 노래를 안 하다가 말이죠. 다 황정태 연출자의 작품이었어요. 난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이에요. 그때 남자 가수가 안무를 받아 춤을 춘 것도 처음이었어요. 리사이틀에서 댄스를 하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때부터 10~20대 여성들로 이뤄진 ‘오빠부대’가 처음 생겨난 거죠.”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도 그때 얻은 거군요.

“어릴 적부터 팝을 좋아했어요. 엘비스의 ‘하운드 도그’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추고, 내 노래 ‘님과 함께’에도 춤을 췄어요. 내 히트곡 60%가 박춘석 작곡가 곡인데, ‘님과 함께’는 다른 사람 곡이었어요. 잘나가던 시절, 그 작곡가가 이 곡을 주겠다고 연락했는데 내가 안 갔어요. 화가 난 작곡가는 다른 가수 주겠다고 방방 뛰었죠. 지구레코드 사장이 가서 곡을 들어보고는 나한테 ‘빨리 가서 곡 받아라’고 해서 뛰어간 거예요. 만약 그 곡이 다른 가수에게 갔다면, 지금 내가 없었을 테죠.”

-지금까지 큰 어려움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삶이 순탄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결혼을 하니까, 바로 반응이 와요. 극장 손님 반도 안 차요. 박수, 환호도 싹 빠지고. 정상에 서봤던 사람이 더 구구절절 느끼는 그 허전함, 회의에 빠져 몇년 동안 미국에서 지냈어요. 다시 돌아와서는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제재를 받았어요. 마약 등 잘못이 있으면 공식 제재를 받는데, 그런 것도 없이 방송 출연이 막혔죠. 좀 알아보니 비공식적으로 막았더라고. 고향 탓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길로 고향 목포에 내려가 지냈어요.”

-1년쯤 지나 출연 제재가 완화됐다면서요?

“화도 나고 오기도 생겨 ‘더러워서 안 한다’ 했어요. 몇년 더 고향에 있다가 다시 나오려니 아는 인맥이 다 끊겨버린 거예요. 내가 연예인으로서 그렇게 비위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오자마자 운 좋아서 잘 풀리고 열심히 한 건데, 상황이 그렇게 되니 자꾸만 위축되고 의욕도 안 생겼어요. 6~7년 동안 노래를 안 해 감도 떨어졌고요. 가수는 직업만으로는 안 돼요. 예술가 정신, 혼이 있어야 해요. 그런 의욕이 사라진 거죠. 내가 감동이 없는데,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어요?”

-몇년 전 속초 무대를 계기로 의욕이 되살아난 거로군요.

“그때부터 새로운 남진, 새로운 가수가 시작된 거지. 그때가 있어 오늘이 있는 거예요. 그때 당장 운동부터 시작했어요. 체중조절, 건강, 정신무장…, 스스로를 바꾸기 시작하니 하늘이 도와주신 거지.”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서 1위를 했다“
꾸며진 것보다 인간적인 걸 선호하는구나
의욕이 더욱 솟고 책임감도 느껴져요”


-데뷔 45돌 공연을 하는 요즘 더 큰 사랑을 받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이 근래 와서 더 잘 풀려요. 얼마 전 출연한 <문화방송> 추석 특집 ‘나는 트로트 가수다’만 해도 그래요. 담당 피디가 섭외를 해오기에 처음엔 고사했어요. 그런데 한달 동안 설득을 하더라고. 트로트계가 침체됐는데, 대선배가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오케이 했죠. 그냥 재미로 좋아하던 노래 ‘비나리’를 편안하게 불렀는데, 그렇게 큰 파장이 올 줄은 몰랐어. 내가 1위를 했고, 시청률도 굉장히 높게 나왔더라고요.”

-방송을 보니 라틴풍의 세련된 편곡에 막 지르지 않고 절제하며 부른 게 인상적이더라고요.

“다른 가수들에 비해 편안하게 불렀는데, 대중이 노래에 실린 감성을 다 알더라고요. 꾸며진 것보다 인간적이고 순수하고 감동적인 걸 더 선호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보람을 느꼈어요. 의욕이 더욱 솟고 책임감도 느껴져요.”

-데뷔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그때보다 더 떨리는 것도 있어요. 지금 노래가 더 어려워. 데뷔 때는 뭣도 모르고 했지만, 지금은 잘못하면 실망을 줄까봐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돼요. 그걸 해소하려면 역시 노력밖에 없어요. 역시 남진 노래구나, 보여줄 수 있는 건 노력뿐이죠. 노래가 몸속에 깊이 묻어서 나와야 해요. 노래를 건성으로 하면 내 만족이 사라져요. 공개방송에서 한 부분만 마음에 안 들어도 온종일 마음에 걸려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내가 싫을 정도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한다니까.”

-요즘 연습은 얼마나 하시나요?

“매일 아무리 못해도 3시간은 해요. 공연 가며 차 안에서 거의 연습하지. 깜빡 잠들지 않으면 계속 연습해. 부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좋은 노래를 계속 들어요. 국경 없이 미국, 일본, 유럽의 노래, 창, 클래식 안 가리고 좋아하는 부분 있으면 들어.”

-라이벌 나훈아씨와 다시 한번 공연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던데요?

“그런 기회가 온다면 꼭 해야지. 우리 시절, 남진-나훈아, 나훈아-남진, 시대의 명라이벌이 있었기에 최고 전성기를 보낸 거 아니겠어? 둘이 같이 무대에 선 적은 텔레비전 방송 스페셜 무대 딱 한번인데, 지금 그 방송을 봐도 참 좋아. 기회가 되면, 우리 두 사람보다, 우리를 만들어준 팬들, 지금은 50~80대가 된 팬들과 함께 옛 추억을 떠올리는 무대로 보답하고 싶어요. 그게 우리 도리지. 근데 나훈아가 지금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다시 나오면 서로를 위해 꼭 그런 기회를 갖게 됐으면 좋겠어요.”

“나훈아와 공연 기회 온다면 꼭 해야지
우릴 만들어준 팬들에 그게 도리
근데 나훈아가 지금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마지막으로 여쭐게요. 특이한 게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사모곡 ‘님오신 목포항’을 다시 내셨더라고요?

“김대중 망명 당시, 그분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는 건 상상도 못 해. 내가 부르고 싶어 부른 건 아니고, 전주 출신 어느 작곡가가 그 노래를 만들어 갖고 온 거라. 디제이야 고향도 같고, 어린 시절 아버지 집에 찾아오고 해서 관심 있었지. 들어보니 가사와 멜로디가 좋더만. 그 작곡가를 만났더니 시골 농사꾼같이 생겼는데, 디제이의 열렬한 팬이더라고. 거기서 감동을 먹었지. 한 동네 목포인으로서 내가 부르지 않으면 작곡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해서 녹음을 했어요. 근데 방송 한번 못 나가고 묻혔어. 그 작곡가와 내 매니저도 안기부 불려가 혼쭐이 났더라고. 그 작곡가는 목숨 내놓고 디제이를 모신 거지. 근데 디제이가 정권 잡고 나서도 그 작곡가에게 연락 한번 안 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그쪽 사람 만난 자리에서 그러면 쓰냐고 하니까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노래를 디제이 추모곡으로 다시 살리게 된 거지. 그 무서운 시절, 그 작곡가 참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얼마 전 돌아가셨어.”

남씨는 예정된 시간을 넘겨가면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 노래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 데 대해 큰 자부심이 묻어나 보였다.

“<한겨레>에 나오면 믿을 수 있제. 우리 아버지도 언론인이었는데, <한겨레>가 잘해야 돼.”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투어 길에 올랐다.

춘천(11월5일), 안산(12일), 목포(19일), 수원(12월4일), 천안(10일), 의정부(17일), 평택(18일), 충주(24일), 전주(25일), 부산(27~28일), 서울(30~31일), 서산(1월7일), 부천(2월4일), 이천(11일) 공연이 남아 있다. 1544-1555.

▣ 인터뷰/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출처] 한겨레 2011년10월31일 / [한겨레가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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