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어나더 데이』와 한국불교가 미국불교를 도와야 하는 까닭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며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폭음과 화염에 휩싸이게 했던 『007 Die Another Day』의 불똥이 불교계에도 번졌다. 문제의 발단은 극중의 제임스 본드와 상대역 할리 베리가 임무를 완수하고 사지에서 탈출하여 (극중 이야기 전개상으로는 한국임에 분명한) 어느 암자의 불상 앞에서 정사를 치루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조계종 종교편향대책위원회는 『007 어나더 데이』가 “우리 국민의 종교적·문화적 정서를 무시한 연출로 채워져 있다”고 지적하며 "특히 내용의 아무런 개연성이 없음에도 불상이 보이는 가운데 정사장면이 나오는 것은 국민의 예경 대상인 불상을 소품화시키고 불교를 무시한 비상식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와 같은 정사 장면은 영화의 본 줄거리와는 그다지 상관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십년 역사의 007 시리즈를 반추해보면 그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007 시리즈는 제임스 본드의 묘기로 시작해서 제임스 본드의 정사로 끝나는 영화이다. 때로는 빙산이 떠다니는 북극에서, 때로는 알프스 정상에서, 때로는 비행기에서 낙하산도 없이 떨어지는 허공에서 제임스 본드는 현란한 액션으로 영화의 첫 장면을 장식한 후 때로는 우주선에서, 때로는 달리는 기차의 객실에서, 그리고 때로는 바다 위의 안락한 캡슐 안에서 모든 임무를 마치고 여주인공들과 정사를 갖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다시 말해, 마지막 정사 장면은 영화 007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이며, 이점은 지나간 007 시리즈를 리플레이해보면 예외 없이 확인된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볼 때 조계종 종교편향대책위원회가 요구한 것처럼 삭제가 가능할 만큼 가벼운 장면은 아니라는 말이다.
『007 어나더 데이』의 감독 리 타마호리는 영화가 팝콘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팝콘의 어떤 면이 영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술성과 사실성을 무시하며 상업적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일은 (팝콘의) 섭취보다는 배설에 가까운 일이다. 딴지일보는 “당 영화에 있는 한국의 모습은 헐리웃에 있어 자기들 입맛에 맞게 맘대로 써 버리고 폐기 처분하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고 분석한 바 있는데, 기왕에 화장실에 갔을 때 없어선 안 되는 것이 휴지라고 한다면, 불상은 제작진의 배변용 휴지로 절묘하게 활용된 셈이다.
『007어나더 데이』에 대한 조계종의 반응이 본 영화에 대한 한국불교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면, 미국불교 입장에선 이 영화가 무엇을 의미할까? 대중문화에서 어느 소재가 다루어지는 방식은 그 소재에 대한 대중적 이해와 태도를 반영한다. 가령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영화 『폴링 다운』에 등장하는 한국인 식료품상인 주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미국의 메인스트림이 재미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한국인의 모습은 또다시 주류사회의 마인드에 각인되어 한국계 미국인의 스테레오타입을 형성한다. 한국인이 자주 다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헐리우드와 같은 주류 매체가 생산해낸 이미지는 재미 한인들의 실제 생활에서 치명적이고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영화에 대한 한국 관람객의 거센 반응에 감독과 영화사는 공히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월드컵 4강 신화가 단지 축구경기일 뿐이고 스토우 부인의 『엉클 톰스 캐빈』이 단지 소설일 뿐이라고 우길 수 없는 것처럼 영화도 엄연한 현실의 일부인 것이다.
최근 들어 미국의 영화계는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를 몇 편 개봉한 적이 있다. 1993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리틀 붓다』를 필두로 『티벳에서의 칠년』과 『쿤둔』이 1997년 개봉되었고, 소재와 설정 면에서 불교영화라고 단정하기에는 모호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교잡지 『트라이시클』이 불교 영화라고 소개한 바 있는 『매트릭스』와 불교영화인지 축구영화인지 애매한『컵』이 1999년 개봉된 일이 있다.
흥미 있는 것은, 이 모든 불교적 영화들의 배경이 영화가 만들어진 미국사회가 아닌 고대인도, 티벳,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 등 미국적 삶의 터전에서 유리된 공간이라는 점이다. 『만다라』『아제아제바라아제』그리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등의 한국산 불교영화처럼 삶의 한 복판에서 불교를 구체적 삶의 문제로써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브래드 피트의 『티벳에서의 칠년』처럼 일상에서 동떨어진 이국적 경험과 상상의 대상으로 불교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로만 본다면 불교는 아직 미국의 본토에 상륙하지 않은 셈이다. 불교를 비교적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의 불교적 사유가 이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007과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불교에 대한 인식 수준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007 어나더 데이』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주요배경이 한국임을 알리기 위하여 설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서 설정된 지뢰가 깔린 휴전선 비무장지대와 불상이 바로 감독이 생각하는 한국의 상징물들이다. 다시 말해, 지뢰와 비무장지대가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상징하며 이후에 전개될 스토리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면, 불상은 감독이 제임스 본드의 소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제시한 한국의 문화적 상징이다. 즉, 감독은 한국사회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이 불교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당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불상을 등장시킨 것과 그곳에서 정사를 벌이는 설정은 별개의 차원이다. 즉, 불상은 그곳이 한국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리고 제임스 본드와 할리 베리의 정사 장면은 영화007의 제작공식에 끼워 맞추기 위하여 삽입한 것인데, 이 장면을 두고 “우리 국민의 종교적·문화적 정서를 무시한 연출”이라고 비판하기에는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대중문화의 제작자는 상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대한으로 대중적 정서에 영합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북한이 아닌)을 주요 시장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제작자가, 그 소비자그룹의 감정을 자극할 내용을 의도적으로 삽입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거슬리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인의 정서를 나름대로 신경 쓴 것이 그 정도 밖에 안 되었다는 뜻이 되겠다.
영화를 수입한 폭스 코리아는 불상이 모셔진 정사 장소를 “그곳은 절이 아니다. 한국이라고 볼 수도 없다” 고 설명했다고 한다. 수입사의 말마따나 문제의 장면이 실제로 촬영된 장소는 한국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용의 전개상 그곳이 국내의 어느 곳일 수밖에 없다면 영화사의 설명은 궤변에 불과하다. 내용상 국내일 수밖에 없는 장면에 굳이 다른 나라의 경치를 삽입한 것, 그리하여 수입사에게 그와 같은 궤변의 여지를 남겨준 점 ― 제작진은 바로 그 정도 선에서 한국인의 종교적 문화적 정서를 배려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참으로 얄팍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속내가 뻔히 읽힘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화사의 말대로 그곳이 절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한국이 아니라면 어디인가?
영화 속에 그려진 불상 앞 정사의 당사자가 한국인이 아닌 점도 감상의 한 포인트이다. 종교적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한국인의 두뇌에는 그와 같은 행동이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 우리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볼 수 있듯이 심지어는 조직 폭력배조차도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는 곳이 바로 한국인의 마인드에 각인된 절집과 불당의 의미이다. 홍경인과 김수로가 불상을 닦다가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놀라고 당황해 하는 표정은 마피아와 같은 다른 나라의 깡패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장면이다. 한국인에게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진 불당에서 정사 장면을 촬영하여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 그리고 그러한 발상이 형상화되어 받아들여지는 풍토, 그것이 바로 대중문화를 통해서 드러난 미국 불교의 현주소이다.
대중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회를 형성하는 가치와 이념의 코드가 보이기도 한다. 일본계 미국인 배우 팻 모리타가 주연하여 큰 성공을 거둔 『가라테 키드(The Karate Kid)』라는 영화가 있다. 비단 불교뿐 아니라 아시아의 문화가 전반적으로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 왜곡되어 전수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영화이다. 극중에서 미야기라는 이름의 일본계 미국인 노인으로 등장하는 팻 모리타는 이웃집에 사는 다니엘이란 백인소년에게 가라테를 가르치게 된다. 개인 교습을 시작하며 미야기와 다니엘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미야기: 가라데는 16세기 중국에서 왔지. 처음에는 손을 의미하는 “테”라고 불리웠단다. 그러다가 나중에 미야기 가문의 조상들이 빈손을 뜻하는 “가라테”라고 부르게 되었지.
다니엘: 저는 가라데가 불교 사원이나 뭐 그런데서 나온 줄 알았어요.
미야기: 넌 테레비를 너무 많이 봤구나...
미국에서 제작된 대중문화를 통해 드러나는 미국인의 불교적 인식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무지이다. 이번 007은 그 무지를 다시 한 번 드러낸 하나의 예이고, 그 무지의 깊이는 우리가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타국의 타종교의 사원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고 가정하면 금방 측량된다. 만약에 전 세계를 무대로 한국판 007을 한국인이 찍는다면, 과연 미국의 교회당이나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한국배우의 정사 장면을 연출할 한국인 영화감독이 있을까? 만일 없다면, 당 영화의 제작진은 정상적인 한국인이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문화적 종교적 도발을 영화적 허구라는 미명으로 자행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그 용기의 원천은 무지이다.
미국에서 불교에 대한 무지는 생각보다 넓게 퍼져 있다. 미시간 대학의 불교학 및 티벳학과 도날드 로페즈 교수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함께 미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불교 상식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로페즈 교수에 따르면 불교학을 전공하는 자신의 많은 학생들조차도 그와 같은 잘못된 상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목록은 『트라이시클』1998년 가을호에 수록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부처님“Buddha"의 철자가 ”Buddah"이다.
2. 모든 불자들은 명상을 한다.
3. 모든 불자들은 대머리이다.
4. 모든 불자들은 채식주의자이다.
5. 부처님은 뚱보이다.
6. 모든 불자들은 사원에서 생활한다.
7.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같다.
8. 모든 불자들은 평화주의자이다.
9. 불교는 철학이다.
10. 환생은 즐겁다.
위와 같은 잘못된 상식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부작용이 예상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다른 지면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위의 불교에 대한 잘못된 상식들이 대부분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라는 점이다. 가령 모든 불자들이 명상을 한다거나 대머리라거나 채식주의자라는 인식은 순수하게 이미지로 얻어진 인식이지 학습된 인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책이나 직접경험이 아닌 대중문화로 습득된 오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역시 대중문화가 잘못된 상식의 주범이라는 결론이다.
미국에서 불교가 급속하게 퍼져가고 있다는 소식이 왕왕 국내에 전해진다. 오프라 윈프리 쇼라든가 ABC 피터 제닝스 리포트 등의 주요 미디어에서도 이따금 불교의 약진을 다루기도 한다. 여기서 우린 미디어의 특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새로운 현상을 쫓는다. 둘째, 다소 과장한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1997년 10월 13일 “America's Fascination with Buddhism (불교에 매혹된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불교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적이 있다. 참선수행을 하는 명사들의 사진과 대중문화에서 표현된 불교의 모습을 모아놓은 화보를 보면 마치 미국은 이미 불국토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커버스토리의 캡션 헤드라인 하나는 “All Over the Country, Pop Goes the Dharma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다르마로 경도된 대중문화)”이다. 작은 사실들을 몇 개 모아 큰 흐름인 것처럼 묘사하는 언론의 과장법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미국사회에서 불교가 점차 뿌리내리고 있음은 여러 가지 증거와 통계로 확인할 수 있지만, 미국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진실은 앞서 소개한 타임지의 커버스토리 헤드라인에도 숨어 있다. 웹스터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fascination” 은 “독특한 힘 혹은 어떤 유별난 혹은 특별한 특징 등으로 이끄는 힘”을 의미한다. 새롭고 신기한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이제 시작이고, 미국에서 불국정토로 가는 길은 아직 요원하다는 뜻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이번 “007 사태” 때문이었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불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미국은 한국과 참으로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에게 정치적으로는 민족의 분단을, 외교적으로는 종속을,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를 안겨준 나라가 미국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 많은 나라인 셈이다. 이런 나라에서 진작부터 부처님의 말씀이 융성했더라면 과연 『007 어나더 데이』같은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조지 부시 같은 대통령이 나타나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 가는 일이 있었을까?
미국판『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볼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미국의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모색해야 할 이유는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이 종권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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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불교와 문화" 1-2월호에 미국에 유학중인 국제포교사회 이종권 포교사가 기고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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