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따라


無我



누가 내게 '당신이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주고 갈 말이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무아(無我)'라는 두 글자입니다.

두번째 세번째 역시 내가 세상에 두고 가고 싶은 말은

'無我'라는 두 글자뿐입니다.

모두가 '나, 내 것, 내 자식 것' 한다면

이 세상은 결국 망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 우리 것, 우리 자식 것' 한다면

이 세상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至人無己 :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神人無功 : 신의 경지에 이른 자는 공을 드러내지 않으며,

聖人無名 : 성인의 경지에 이른 자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느니라.



이 곳에 무(無)자 대신에 자아(自我)를 넣게 되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無我'가 세상을 다스려야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 "세상을 바꾼 가르침" 중에서 -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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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정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大雲  (Homepage) 2011-11-29 01:22:39, 조회 : 3,459, 추천 : 498



종정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종교평화선언을 보류하라'는 유시를 듣고

종정스님,
법체 편안하신지요? 지금쯤이면 가야산에도 단풍이 다 지고 겨울이 깊이 다가와 여간 춥지 않을 터인데 혹 감기에 걸리거나 하는 일은 없으신지요?

스님,
제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벌써 오래 전부터 얼음이 얼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충분하게 때고 잠자리에 눕지만 새벽이 되기도 전에 구들이 식어서, 때로는 늦잠을 자고 싶어도 그 ‘게으름’이라는 사치를 누릴 자유조차 없습니다. 낮에는 또 산중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며 쓰러진 나무 등걸이나 나뭇가지들을 모아 지게에 짊어지고 오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냅니다. 이래서 요즈음 젊은 출가자들이 산 속에 머물기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툰 지게질로 비탈길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옮기며 순간순간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기름보일러 덕분에 뜨끈뜨끈해진 선방에서 좌복을 깔고 앉아 참선에 드는 것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시간입니다. 지게질을 하거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 불길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면 문득 무상을 실감하고, “내가 출가하길 잘 했구나!”하며 제 자신의 선택에 감동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편하게 지내고 그야말로 소요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만, 종정스님께서는 이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종단의 대소사를 걱정하시고, 해인총림 방장으로서 총림의 살림을 챙기시느라 혹 너무 큰 불편을 겪고 계시지는 않은지 염려가 되지만 스님을 모시는 분들이 모든 일을 잘 처리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종정스님,
며칠 전 스님께서 이른바 <종교평화선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유시를 내리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선언을 지적하니 새로이 하라

종단사를 긍정하는 것이 도리지만 불조혜명의 계승과 소실종지가 본분사입니다.
종교 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의 취지는 긍정할 만합니다.
준비한 원고를 가지고 만인이 공감하는 선언의 완성을 위해 지적합니다.
서두르면 불조의 근본을 소홀히 하고 대중의 공의가 충분치 못하니 불조혜명의 교의와 명분에 충실할 수 있도록 더 널리 의견을 구해야 합니다.
부디 지혜와 공의를 모아 새로운 어른의 청청한 기운으로 새롭게 완성해서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당부합니다.
종정스님,
스님께서 <종교평화선언> 발표를 보류하라는 유시를 내리셨다고 들었을 때, 저는 퍼뜩 “큰 일 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조계종단의 역사에서 ‘종정-총무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가까이는 지난 1998년의 종단분규에서 보았듯이 종정예하께서 총무원이 추진하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하여 ‘유시’나 ‘교시’라는 이름으로 반대의 의견을 밝히고 이를 무기로 종단에 분란과 분규가 일어났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걱정을 갖고 총무원과 결사추진본부의 대응을 주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 총무원과 결사본부에서는, 종정스님께서 유시를 내리신 지 하루만에 “종정예하의 뜻을 받들어 모시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히고, 29일로 예정되었던 <종교평화선언> 발표를 무기 연기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저는 “또 다시 종단 분규의 악몽을 겪지는 않겠구나!”하며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래야 자신들이 할 역할이 있을 것이라 계산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며 평화선언 발표를 방해하였던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마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짐작합니다.

꼭 조계종도가 아니더라도 이 땅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서 혹 수습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갈까봐 노심초사하며 지내오다가, 종교 갈등의 피해 당사자인 불교계가 앞장서서 ‘종교 평화’를 선언하고 이웃종교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데에 대해 수많은 국민대중이 환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종교평화선언> 때문에 종단 내에서 갈등이 커지고 분규로까지 이어진다면, 그 상처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어질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계종도들이 겪을 혼란, 외부 세계의 환영을 받다가 마지막 순간에 발표가 좌절되면서 이웃종교와 시민들에게서 조계종단에 쏟아질 비난과 종단의 위상 실추, 아니 이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평화’와 ‘화합’을 갈망하던 국민 대중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종정스님,
‘평화선언 발표 유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며 놀랐던 가슴을 추스르고 난 뒤, 언론을 통해 전해진 스님의 유시를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저는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난 10년 동안 종정스님 명의로 발표된 스님의 법어를 대하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 큰스님의 큰 뜻을 짐작할 수 없어 머리를 싸맸던 적이 많았었는데, 이번 유시는 “종교평화선언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좀 더 신중하게 하라”는 스님의 뜻을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도록 분명하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유시야말로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큰스님께서 직접 확고한 뜻을 밝히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정스님,
제가 더 큰 감사를 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조계종단의 짧은 역사 동안 종정스님의 뜻을 오도하거나 종정스님의 이름을 팔아 종단을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어는 종정스님이 ‘탈종’까지 하게 하는 측근의 횡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종정스님께서 재임하시는 지난 10년 동안 종단이 그래도 큰 문제없이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물론 해인사에서는 종정(방장)스님의 측근이 스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고 바깥세상의 권력자와 돈 많은 사람들에게 “납골당을 지어 달라. 청동대장경 사업을 도와 달라. ……” 등등의 부탁을 하고 그래서 종정스님께 누가 된 적은 자주 있었지만, 이 측근도 종단 전체의 일을 망치거나 혼란에 빠뜨린 적은 없었으니,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종단을 이토록 평화롭게 해주신 데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는 종도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혹시라도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기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이 “이번 유시도 종정스님의 뜻이 아닐 거야. 여러 가지 일로 총무원과 결사본부에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는 종정스님의 측근들이 설득해서 이런 유시를 나오게 했을 거야. ……”라면서 입방아를 찢을 가능성이 아주 높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정스님이 측근의 장난에 흔들리실 분이 아닌 다음에야 이 문제는 그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종정스님,
지난 10년 동안 측근이 발호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주시고 그래서 종단이 평화롭게 지내올 수 있게 해주신 데 대하여 거듭 감사드립니다. <종교평화선언>의 소소한 문제점까지 꼼꼼하게 짚어주시고 발표 보류를 지시하시며, ‘선언 발표’로 세상에서 받게 될 칭송과 큰 공덕을 다음 종정스님께 넘겨드리려는 스님의 넓으신 아량에 또 다시 감사드립니다.

깊은 산속에서 지게질하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순간이 참선 명상에 최고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이 감히 종정스님께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저자거리가 싫고 종단 정치같은 것은 나와 아무 상관 없다”며 도시를 떠나온 몸이지만 어쩔 수 없이 총무원과 조계사 주변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 또한 벗어버리기 쉽지 않은 업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종정스님,
세상 사람들의 이런저런 구설에 신경 쓰지 마시고, 부디 법체 평안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코 끌을 찌르는 짙은 매화 향기와 함께 전해지는 봄소식과 더불어, 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법체 청정한 다음 종정스님을 모시고 여법하게 <종교평화선언>을 온 세상에 널리 선포하고 모든 종교인들이 기쁨의 춤을 덩실덩실 추게 될 날을 기대합니다.

불기 2555년 11월 28일

지리산에서 澄潭 삼가 올림

▣ 智異山人_澄潭

[출처] 불교포커스 2011년11월28일





21세기 아쇼까 선언’의 수정본을 읽고

[긴급 기고]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8월 23일 발표한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초안)을 수정?보완한 최종본을 11월 29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명의로 발표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필자는 <불교닷컴>이 입수했다는 ‘최종본’(사실은 그 후 다시 수정했기 때문에 최종본이 아니다. 여기서는 ‘수정본’이라고 한다)을 읽고도 지금까지 망설였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한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지난 3개월간 이 선언과 관련해 다섯 차례나 문제를 제기했던 필자로서 침묵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앞두고 외면하는 것은 동시대 출자자의 한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수정본’이 교계 언론에 퍼진 뒤, <불교닷컴>의 서현욱 기자는 11월 21일자 기사에서 “최종본은 교계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열린 진리관, 시대착오적 종교 다원주의, 아쇼까 선언 부제 등을 고수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선언문의 사상적 토대인 종교다원주의 역시 이미 용도 폐기된 것이라는 주장이 거세지면서 대중공사를 통한 내용 수정 작업에 들어갔지만 결국 골자는 유지한 채 전체적인 표현의 일부 수정에 그쳤다”고 보도했다.

또한 BTN의 하경목 기자는 “화쟁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제기됐던 내용들의 많은 부분을 수용했다”면서 “쟁점이 됐던 3가지 중 2가지는 수용됐다”고 밝혔지만, 법응스님은 “일부 단어와 문장을 바꾸었으나 사실상 그대로”라며 “역시 굴종적이며 신학적 종교다원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화쟁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제기됐던 내용들의 많은 부분을 수용했다”는 입장이다. 반면 일부 언론과 법응스님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법응스님은 “일부 단어와 문장을 바꾸었으나 사실상 그대로”이며, “신학적 종교다원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필자가 ‘수정본’을 접하고 우선 눈에 거슬리는 문장을 좀 더 수정?보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비공식적으로 표명한 바 있다. 아마 최종본에서는 이미 수정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는 수정본을 근거로 논란이 되고 있는 쟁점들을 다시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초안의 분량을 대폭 줄여 두 쪽 반으로 줄인 것은 매우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좀 더 줄여서 한두 쪽 분량으로 만들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초안을 수정하면서 고심한 흔적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둘째, ‘21세기 아쇼카 선언’의 초안에서 쟁점이 됐던 부분은 ‘열린 진리관’과 ‘전법의 원칙’ 및 ‘아쇼카 선언이라는 부제’가 문제로 대두됐다. 그런데 화쟁위는 “쟁점이 됐던 3가지 중 2가지는 수용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제인 ‘21세기 아쇼까 선언’은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아쇼카’를 ‘아쇼까’로 바꾸었을 뿐이다.

부제를 바꾸지 않았다는 자체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초안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화쟁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화쟁위는 토론을 거쳐 초안을 수정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사실상 기본 골자는 수정하지 않았다. 화쟁위 관계자는 쟁점이 됐던 두 가지는 수용했다고 하지만, 단어와 문장만 다듬었을 뿐 초안의 근간은 그대로다. 다시 말해서 초안의 내용을 대폭 줄이고 오해를 받을만한 단어와 문장을 삭제하는 등 많은 부분을 수정했지만, 핵심 내용은 변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불교관과 종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쟁위 관계자들은 ‘열린 진리관’(실제로는 ‘열린 종교관’이라 해야 옳다)이 옳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이미 용도 폐기된 종교다원주의를 근거로 불교와 타종교가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이웃종교는 나의 종교를 비추는 거울입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반대자들은 불교는 타종교와 다른 차별성을 강조한다. 불교는 절대자(神)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러한 불교 고유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은 곧 불교의 자멸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처럼 불교관과 타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필자는 다섯 번째 글에서 “초안의 근간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몇 군데 수정만으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이미 말했던 것이다.

셋째, 수정문에 따르면, “그동안 불교인은 우리사회 종교 갈등을 해결하고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못했습니다. 이웃종교를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또 하나의 길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라고 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참으로 굴욕적인 느낌을 받았다. 우리 불교도가 이처럼 반성하고 참회해야 할 잘못을 저질렀는가? 화쟁위 관계자들이 뜬금없는 아쇼까 선언 초안을 발표함으로써 불교계 내부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사실에 대해 먼저 사부대중에게 반성하고 참회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넷째, 수정문에 나오는 “따라서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과 장점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필자는 첫 번째 글에서 “패배주의자의 넋두리처럼 들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불교도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부처님이 비판했던 외도(外道)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선언에 동의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부심이 없었다면 지금껏 출가자의 신분으로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 수정문에 나오는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대목은 최종본에서 수정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는 문장을 그대로 두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전법포기 선언’에 해당될 것이다. 다종교 사회에서 자신의 종교를 널리 펼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지금도 전국의 도처에서 기독교 광신자들이 훼불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상황에서 “전법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는 선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여섯째, 수정문에 따르면, “평화만이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비폭력은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관이자 실천윤리입니다. 행동만 아니라 말과 마음도 비폭력적이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비폭력이라는 단어는 폭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 수단을 말한다. 따라서 비폭력도 폭력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투쟁에 불과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힘사(ahi?s?)는 ‘불해(不害)’, 즉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교는 비폭력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툼 없음[無諍]’, ‘다툼의 소멸[滅盡], 즉 멸쟁(滅諍)을 원칙으로 한다. 비폭력이라는 단어도 종교평화를 논하면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 용어에 해당된다.

일곱째, 이 선언문에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을 추가한 것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다. 선언문에 ‘서원’을 추가한 것은 격식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불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의 글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이 선언의 근간이 되는 불교관과 종교다원주의의 문제점에 집중하다보니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여덟째, 전체적으로 이 선언문은 불교의 근본교설에 위배되는 잘못된 불교관을 토대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수정본에 따르면, “첫째,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불교를 통해서만 평화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러한 사상은 종교다원주의에서 말하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와 대승불교의 여래장(如來藏)?법성(法性)?진여(眞如)?진아(眞我) 등이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불교 고유의 사상은 일체의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의 기독교 불교학자들은 ‘여래장’ 사상의 기원과 그 쓰임새에 대한 교리적 이해부족으로 대승불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시도까지 성행하고 있다. 이들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장?법성?진여?진아 등을 상일주재의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잘못된 불교관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불교와 기독교가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특히 존 키난(John P. Keenan) 같은 학자는 대승불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서구 신학이 비록 진리와 품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교의, 곧 성육화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보고 대승불교의 관점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대승불교 사상이 여러모로 그리스 철학의 본질주의적 사상이나 서구 신학보다는 더 나은 언어를 제공하고 있다고 믿는다.”[존 키난, ??대승불교, 그리스도를 말하다??, 황경훈 옮김(서울: 우리신학연구소, 2006), p.9]

이처럼 왜곡된 사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21세기 아쇼까 선언’이 가져다 줄 미래의 피해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불교의 교리에 밝지 못한 재가불자들을 혼란케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면 앞으로 누가 책임질 것인가? 후대 한국불교사에서 치욕의 역사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두렵고 두렵다.

누리꾼들은 필자가 왜 돈도 되지 않는 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화쟁위가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을 발표하든지 별로 상관이 없다. 필자는 필자 나름대로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아쇼카 선언’의 완성본이 발표되기 전에 필자는 이 선언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 즉각 폐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마성 _ 팔리문헌연구소장

[출처] 불교포커스 2011년11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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