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0월4-5일 한겨레신문 주관으로 주강현 선생과 함께 떠난 제주민속기행에서 함께 했던 박재동 화백과의 만남시간에 참가자들에게 A4용지에 즉석에서 그려주었던 자신의 스케치. 참가자들과 바람이 세찬 제주아부오름에 올랐을때의 헝클어진 머리털 모습으로 찍은 기념촬영입니다.
KHKIM
Jae-Dong Park



나는 왜 불교를 좋아하는가

- 박재동 화백 -

내가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를 어떻게 말할까. 이건 참, 좋아하는 사람을 왜 좋아하냐고 묻는 것과 비슷해서 금방 말하기 어렵구나. 숫타니파아타를 읽었을 때 그 육성과 같은 부처님의 강렬한 말씀의 감동을 이야기할까, 아니면 부산 에서 해산스님을 만났을 때의 그 잊지 못할 이야기와 팔뚝에 불을 태운 후 관세음보살의 빛을 본 것을 이야기할까, 아니면 팔만대장경을 읽을 때, 한 도가니 가득 꿀물을 마시듯 달디달았다는 것을 이야기할까.

그 모든 것이 다 불교가 좋은 이유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추려 말하라면 뭐니뭐니 해도 첫째는 내게 '생사의 구조'를 알게 해 준 것이다.

어릴 때 난 세상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안 죽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분명한데 내가 어떻게 죽는다는 말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후에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시절 나는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채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남들에게 그럴 듯하게 잘 보이기 위해 행동하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나를 벗겨내고 진짜배기 나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죽음을 이겨내고 싶었다. 여행을 뭐 시련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어떻든 그런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서 해방된 것은 그때의 그 여행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 해방은 나중에 불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 씌어 있는 정보를 통해서였다.

영혼의 윤회 이야기 말이다. 사람은 죽으면 그 업에 따라 적절한 곳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죽으면 내게 적당한 곳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오늘의 앞에는 반드시 어제가 있었듯이 전생은 어제와 같이 있었고 내생은 내일과 같이 온다. 죽음은 잠과 같이 의식을 정리하며 다시 태어남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생사의 구조를 알고 난뒤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졌다. 사람에게 죽음은 없다. 끝없는 변화가 있을 뿐이다. 변화를 통하여 인간은 인격을 향상시켜 간다. 그러므로 죽음은 없는 것이다.

이 정도로도 불교가 좋은 이유는 충분하지만 굳이 한가지를 더 보탠다면 불교는 평소에 근본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두이다. 난 청년 시절부터 화두를 자주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라면 이런 뜻일까 저런 뜻일까를 늘 생각했던 것이다. 아까 말한 해산 스님도 '말을 하고 눈을 껌뻑거리는 그게 무엇이고? 무엇이 보고 듣고 말하노?' 하는 화두를 주셨다. 만법귀일이라던가, 이런 저런 수수께끼는 나를 언제나 근본적인 것과 함께, 또 궁극과 함께 있도록 해준다. 어떤 때는 그 많은 화두를 다 푼 것 같기도 하고 또 지나보면 그게 아닌가보네 한다. 그러나 그 결과 지금 '네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는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 것, 아직도 깨달아야 할 것은 많지만 내겐 참 중요한 일이다.

불교가 좋은 이유는 많고 많다. 그러나 이 두가지 만으로도 불교는 얼마나 좋은 일인가.

[출처] 불기2547년9월19일 금요일자 불교신문 제1965호 5면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펴낸 박재동 화백

“세상에 나가보니 인드라망 보였죠”

서울 양재동 보금자리인 오돌또기 사무실에서 만난 박재동 화백은 완만한 구릉만큼 긴 얼굴처럼 느리고 완만했다. 우리시대의 ‘3대 왕구라’로 불리는 김구라(김지하 시인) 백구라(백기완 선생) 황구라(황석영소설가)만 못하지만 ‘제1대 노가리스’다운 입담을 토해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인정하는 ‘촌철살인’의 대가다웠다. 거두절미하고 핵심을 찌르는 속도전에 왕성한 호기심까지 그의 시선은 종잡을 수 없었다.

“어 불교신문도 다녀왔네요. 그런데 우리와는 거꾸로 다녀왔습니다. 사진도 글도 상세하네요. 참 읽을 거리가 많은 것 같네요. 우리는 서울 북경 돈황 타클라마칸 호탄 간다라 델리까지 여정이었습니다.”

2000년 실크로드를 다녀오기 전까지는 박 화백은 철저하게 ‘우리 것은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토종주의자’였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그런 그의 시각을 바꿔버렸다. 사람과 역사와 자연을 보는 눈을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만 잘되면 된다’는 시각에서 ‘ 모두다 잘돼야 우리도 잘된다’는 인드라망적인 시선을 갖게된 것이다.

“간다라 미술을 보며 원래 우리불교미술의 원형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변화해서 우리에게 수용됐는지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원래 관세음보살은 건장한 남자에서 중국 우리나라로 거치면서 여성성을 갖게 됐습니다.”


불교속 만화소재 무궁무진 나중에라도 그려보고 싶어

실크로드를 이야기하던 그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불교에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로 꾸밀 이야기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미륵보살의 전생을 봐요. 명예욕이 아주 강했던 미륵보살은 아주 잘난체를 하지만 실은 아주 미련해서 경전 한 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 그런 미륵보살을 제도해 미륵보살을 만들잖아요. 이런 이야기들 못난 우리들에게 정말 용기를 주거든요”

불교설화 그리고 고승평전 경전 스님이야기까지 ‘만화’나 ‘애니메이션’화 시킬 작품들이 산더미처럼 그의 입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쑥스러운 듯 또 이야기를 바꿨다. 절집에 살고 싶은 소원이 이루어진 이야기 였다. 그의 소원은 절 집에서 군불이나 때며 스님들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소원을 90년 초반에 인연을 맺은 중앙승가대 신문 ‘경책마당’이 들어주었다는 것이었다. 참 ‘황당’했지만 그의 진지한 얼굴은 그런 ‘황당함’을 충분히 ‘감추’고도 남았다. 고개를 극적거리며 그때 인연을 맺은 스님들의 이름과 근황을 묻는다.

“좀더 있다가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스님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보고 싶습니다. 포교차원에서 불교단편 설화들은 지금도 한번 욕심을 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관심을 갖고 도움을 준다면 말입니다”

‘풍자’와 ‘파격’속에 감춰진 진실을 들춰내 정치적 억압 속에 헉헉거리던 대중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줬던 한겨레 그림판의 박재동 화백은 어느새 인간과 자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자연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박재동 화백은 자금성에서 바양블라크 호수까지를 담은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한겨레신문사)을 출간했다.


이상균 기자 gyun20@ibulgyo.com

2003-06-15 오후 10:14:03 수정
[출처] http://www.ibulgyo.com/


  최종 수정일: 2003년 11월30일, (C)1997-2003 김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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